숙비 소씨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숙비 소씨는 당 고종의 후궁으로, 당 태종 치세에 태자였던 고종의 후궁이었다. 그녀는 고종 즉위 후 숙비로 책봉되었으나, 무측천의 등장으로 고종의 총애를 잃고 왕 황후와 함께 폐위되어 감금되었다. 이후 무측천의 사주로 처형되었으며, 소숙비의 딸들은 가택 연금되었다가 결혼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당나라의 후궁 - 양귀비 (당나라)
양귀비는 당 현종의 황귀비로서 뛰어난 미모와 재능으로 총애를 받았으나, 친족의 권력 남용과 안사의 난으로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한 중국 4대 미인 중 한 명이며, 그녀의 삶은 많은 예술 작품의 소재가 되었다. - 당나라의 후궁 - 무혜비
당 현종의 후궁인 무혜비는 측천무후의 친족으로, 현종의 총애를 받아 후궁으로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며 황후 책봉 논의가 있었고, 아들을 태자로 만들기 위해 정치적 암투를 벌이다 태자 이영을 모함하여 폐위시키고 자결하게 만들었다. - 655년 사망 - 왕황후 (당나라)
당 고종의 황후인 왕황후는 동안공주의 손녀로, 통안공주의 추천으로 황후가 되었으나 후사가 없었고, 소숙비를 견제하려 데려온 무측천과의 권력 다툼에서 패배하여 폐서인된 후 무측천에 의해 살해당했다. - 655년 사망 - 펜다 (군주)
7세기 머시아 왕국의 국왕 펜다는 강력한 군사 지도자로서 여러 전투에서 승리하며 세력을 확장했지만, 윈웨드 전투에서 패배하여 전사했다. - 생년 미상 - 손니 알리
손니 알리는 송가이 제국의 군주로서 니제르 강 유역을 장악한 후 팀북투와 젠네를 정복하고 군사력을 강화하여 제국을 확장했으며, 전통 신앙과 이슬람교 조화, 법에 의한 국가 통제, 무역 확립 등 내치에도 힘썼다. - 생년 미상 - 김조국
김조국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인으로, 2019년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위원 겸 당 중앙군사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으며, 당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으로 임명되었다.
숙비 소씨 | |
---|---|
인물 정보 | |
이름 | 소씨 (蕭氏) |
배우자 | 당 고종 |
자녀 | 이소절, 의양공주, 고안공주 |
사망일 | 655년 12월 3일 |
사망 장소 | 장안 |
생애 | |
출생 | 알려지지 않음 |
가문 | 남량 황족의 후손 |
작위 | 숙비 |
몰락 | 무측천에 의해 살해됨 |
2. 배경
숙비 소씨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당 고종의 아버지 당 태종 치세 당시 태자였던 당 고종의 후궁이었으며, 646년에 아들 이소절을 낳았는데, 이는 649년 당 고종의 즉위 이전의 일이다. 소씨는 태자비 시절 ''양제''(良娣)라는 작위를 받았다.[2] 또한 태자비 왕씨보다 당 고종에게 더 총애를 받았다고 전해진다.
2. 1. 가계와 초기 생애
숙비 소씨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그녀는 당 고종의 아버지 당 태종 치세 당시 태자였던 당 고종의 후궁이었는데, 646년에 아들 이소절을 낳았다. 이는 당 고종이 즉위한 649년 이전의 일이다. 소씨는 태자비 시절 ''양제''(良娣)라는 작위를 받았다.[2] 이소절 외에도 두 딸을 낳았는데, 아마도 이소절보다 나이가 많았을 것으로 추정된다.[2] 또한 소씨는 당 고종의 부인 태자비 왕씨보다 그에게 더 총애를 받았다고 전해진다.3. 황궁 생활
649년, 태종이 사망하고 고종(이치)이 즉위했다. 고종은 태자비 왕씨를 황후로, 소씨를 후궁 중 두 번째로 높은 품계인 숙비로 책봉했다. 소씨는 계속해서 고종의 총애를 받았고, 이는 왕후의 질투를 불러일으켰다. 얼마 지나지 않아 왕후와 소씨는 공통의 적을 마주하게 되었다.[3]
고종은 태자 시절, 태종의 후궁이었던 무씨의 미모에 반했다. 태종 사후, 아들을 낳지 못한 후궁들은 불교 비구니가 되기 위해 감업사로 보내졌다. 650년 또는 651년, 고종이 감업사를 방문했을 때 무씨를 보게 되었고,[3] 두 사람은 함께 눈물을 흘렸다.
3. 1. 왕 황후와의 갈등
649년, 태종이 사망하고 고종(이치)이 즉위했다. 고종은 태자비 왕씨를 황후로, 소씨를 후궁 중 두 번째로 높은 품계인 숙비로 책봉했다. 소씨는 계속해서 고종의 총애를 받았고, 이는 왕후의 질투를 불러일으켰다. 얼마 지나지 않아 왕후와 소씨는 공통의 적을 마주하게 되었다.[3]고종은 태자 시절, 태종의 후궁이었던 무씨의 미모에 반했다. 태종 사후, 아들을 낳지 못한 후궁들은 불교 비구니가 되기 위해 감업사(感業寺)로 보내졌다. 650년 또는 651년, 고종이 감업사를 방문했을 때 무씨를 보게 되었고,[3] 두 사람은 함께 눈물을 흘렸다. 왕후는 이를 듣고 소씨에게서 고종의 총애를 돌리기 위해 무씨에게 몰래 머리를 기르게 하고 고종에게 후궁으로 들일 것을 제안했다. 무씨는 처음에 겸손하게 행동하며 왕후에게 아첨했고, 왕후는 그녀를 신뢰하여 고종에게 추천했다. 그러나 곧 고종은 무씨에게 빠져들었고, 왕후와 소씨는 모두 총애를 잃었다. 두 사람은 힘을 합쳐 무씨를 멀리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654년, 무씨는 왕후가 자신의 딸을 죽였다고 모함했고, 655년에는 왕후와 그녀의 어머니 유씨 부인이 주술을 사용했다고 고발했다. 고종은 왕후와 소씨를 모두 폐위하여 평민으로 강등하고 궁궐 안에 가두었다.
3. 2. 무측천의 등장과 권력 투쟁
649년, 태종이 사망한 후, 이치(고종)가 즉위하여 황제가 되었다. 그는 태자비 왕씨를 황후로 책봉했고, 소씨를 후궁 중 두 번째로 높은 품계인 ''숙비''로 책봉했다. 소씨는 계속해서 총애를 받았고, 이는 왕후의 질투심을 불러일으켰다.[3]고종은 태자 시절, 태종의 후궁 중 한 명인 무씨의 미모에 매료되었다. 태종 사후, 아들을 낳지 못한 모든 후궁들은 불교 비구니가 되기 위해 감업사(感業寺)에 수용되었다. 650년 또는 651년, 고종이 부처에게 향을 올리기 위해 감업사를 방문했을 때 무씨를 보게 되었다.[3] 두 사람은 함께 눈물을 흘렸다. 이를 들은 왕후는 소씨로부터 고종의 총애를 돌리기 위해, 무씨에게 몰래 머리를 다시 기르도록 지시하는 한편, 고종에게 그녀를 후궁으로 맞이할 것을 제안했다. 무씨는 지혜롭고 계략에 능했기에, 처음 궁궐로 돌아왔을 때 겸손하게 행동하며 왕후에게 아첨했고, 왕후는 그녀를 몹시 신뢰하며 고종에게 추천했다. 곧 고종은 무씨에게 매료되었다. 왕후와 소씨는 모두 총애를 잃었고, 상황의 심각성을 깨닫고 무씨를 고종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654년, 무씨는 왕후가 자신의 딸을 죽였다고 모함했고, 655년에는 왕후와 그녀의 어머니 유씨 부인이 마법을 사용했다고 추가로 고발했다. 고종은 왕후와 소씨를 모두 폐위하여 평민으로 강등하고 궁궐 안에 가두었다.
4. 몰락과 죽음
649년, 태종이 사망하고 고종 이치(李治)가 즉위하면서 소씨는 후궁 중 두 번째 품계인 숙비(淑妃)에 책봉되었다. 소씨는 고종의 총애를 받았으나, 무측천이 등장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654년, 무씨는 왕황후가 자신의 딸을 죽였다고 모함했고, 655년에는 왕황후와 그녀의 어머니가 마법을 사용했다고 고발했다. 고종은 왕황후와 소씨를 모두 폐위하여 평민으로 강등하고 궁궐 안에 가두었다.[4]
왕황후가 폐위된 지 6일 후, 무씨는 황후로 책봉되었다.[5] 무황후는 왕황후와 소숙비를 문과 창문이 꽉 막힌 건물 안에 가두고 음식만 전달할 수 있는 구멍을 뚫어 놓았다. 어느 날 고종이 그들을 방문하여 처참한 상황을 보고 슬퍼하며 "황후, 숙비, 어디 있소?"라고 외치자, 왕황후는 "저희는 죄를 짓고 시녀로 전락했습니다. 어찌 존칭으로 불릴 수 있겠습니까?"라고 답하며 "이 곳의 이름을 '회심원'(回心院, "참회의 정원"이라는 뜻)으로 바꿔 주십시오."라고 간청했다. 고종이 호의를 보이자, 무황후는 격노하여 왕황후와 소숙비에게 각각 100대의 매질을 가하고 손발을 자른 뒤 큰 술 항아리에 넣고 "이 두 마녀가 뼈까지 술에 절게 하라!"고 명령했다.[6] 왕황후는 "폐하 만수무강하시고, 조의(昭儀, 무후가 후궁으로서의 칭호이며, 황후로 인정하지 않음을 암시함)가 영원히 총애받기를 바랍니다. 죽는 것은 제 책임입니다."라고 말했고, 소숙비는 "무씨는 간사한 괴물이다! 내가 고양이로 환생하고, 그녀는 쥐로 환생하여 영원히 그녀의 목을 물어뜯겠다!"라고 저주했다.[6] 소숙비의 죽음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하위 섹션에서 다룬다.
4. 1. 감금과 최후
649년, 태종이 사망하고 고종 이치(李治)가 즉위하면서 소씨는 후궁 중 두 번째 품계인 숙비(淑妃)에 책봉되었다. 소씨는 고종의 총애를 받았으나, 무측천이 등장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654년, 무씨는 왕황후가 자신의 딸을 죽였다고 모함했고, 655년에는 왕황후와 그녀의 어머니가 마법을 사용했다고 고발했다. 고종은 왕황후와 소씨를 모두 폐위하여 평민으로 강등하고 궁궐 안에 가두었다.[4]왕황후가 폐위된 지 6일 후, 무씨는 황후로 책봉되었다.[5] 무황후는 왕황후와 소숙비를 문과 창문이 꽉 막힌 건물 안에 가두고 음식만 전달할 수 있는 구멍을 뚫어 놓았다. 어느 날 고종이 그들을 방문하여 처참한 상황을 보고 슬퍼하며 "황후, 숙비, 어디 있소?"라고 외치자, 왕황후는 "저희는 죄를 짓고 시녀로 전락했습니다. 어찌 존칭으로 불릴 수 있겠습니까?"라고 답하며 "이 곳의 이름을 '회심원'(回心院, "참회의 정원"이라는 뜻)으로 바꿔 주십시오."라고 간청했다. 고종이 호의를 보이자, 무황후는 격노하여 왕황후와 소숙비에게 각각 100대의 매질을 가하고 손발을 자른 뒤 큰 술 항아리에 넣고 "이 두 마녀가 뼈까지 술에 절게 하라!"고 명령했다.[6] 왕황후는 "폐하 만수무강하시고, 조의(昭儀, 무후가 후궁으로서의 칭호이며, 황후로 인정하지 않음을 암시함)가 영원히 총애받기를 바랍니다. 죽는 것은 제 책임입니다."라고 말했고, 소숙비는 "무씨는 간사한 괴물이다! 내가 고양이로 환생하고, 그녀는 쥐로 환생하여 영원히 그녀의 목을 물어뜯겠다!"라고 저주했다.[6]
왕황후와 소숙비는 며칠 동안 고통받다 죽었고, 무후는 그들의 시신을 꺼내 목을 베었다. 무후는 소숙비의 저주 때문에 궁궐에서 고양이를 기르는 것을 금지했다. 그 후 무후는 왕황후와 소숙비의 귀신에 시달려 봉래궁으로 거처를 옮겼으나, 계속 꿈에 나타나자 낙양으로 이동했다.
무후는 소숙비의 두 딸 의양공주와 고안공주를 가택 연금하고 결혼을 금지했다. 태자 이홍의 중재로 671년경 결혼이 허락되었으나, 무후는 친위대와 즉시 결혼시켰다. 소숙비의 아들 이수절은 황태자가 되지 못하고 무후에게 미움을 받아 감시당하다가 690년 무후의 명령으로 살해되었다.
4. 1. 1. 사망 원인 논란
고종은 소씨를 후궁으로 총애하였으나, 이는 왕후의 질투를 유발했다. 고종이 태종의 후궁이었던 무씨에게 매혹되자, 왕후는 소씨의 총애를 분산시키기 위해 무씨를 후궁으로 추천했다. 그러나 왕후와 소씨는 모두 총애를 잃었고, 무씨를 제거하려 했으나 실패했다.[3]654년, 무씨는 왕후가 자신의 딸을 죽였다고 모함했고, 655년에는 왕후와 그녀의 어머니가 마법을 사용했다고 고발했다. 고종은 왕후와 소씨를 평민으로 강등하고 궁궐에 가두었다.[4]
『구당서』는 소숙비와 왕황후가 질식사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당나라 초기 역사서인 『당회요』에는 이러한 기록이 없다. 송나라 역사가들은 측천무후를 폄하하고 황후들의 권력을 억제하기 위해 여태후의 잔혹한 행적을 각색했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신당서』와 『구당서』에는 여러 불일치와 모순이 존재하며, 최근 발굴된 묘지명과 비교했을 때 더 많은 불일치가 발견된다. 따라서 소숙비와 왕황후는 질식사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추정된다.[4]
왕황후 폐위 6일 후, 무씨는 황후가 되었다.[5] 무황후는 왕황후와 소숙비를 감금하고, 문과 창문이 막힌 건물에 가두어 음식만 전달할 수 있는 구멍을 뚫었다. 고종이 그들을 방문했을 때, 무황후는 격노하여 그들의 사형을 명령했다. 왕황후와 소숙비는 매질을 당하고 손발이 잘린 채 술 항아리에 넣어졌다. 소숙비는 "무씨는 간사한 괴물이다! 내가 고양이로 환생하고, 그녀는 쥐로 환생하여 영원히 그녀의 목을 물어뜯겠다!"라고 저주했다.[6]
왕황후와 소숙비는 며칠 동안 고통받다 죽었고, 무후는 그들의 시신을 꺼내 목을 베었다. 무후는 소숙비의 저주 때문에 궁궐에서 고양이를 기르는 것을 금지했다. 무후는 왕황후와 소숙비의 귀신에 시달려 봉래궁으로 거처를 옮겼으나, 계속 꿈에 나타나자 낙양으로 이동했다. 왕황후와 소숙비의 성씨는 무후에 의해 각각 망(蟒, 비단뱀)과 효(梟, 올빼미)로 바뀌었다가, 705년 무후 사후에 복원되었다.[6]
무후는 소숙비의 두 딸 의양공주와 고안공주를 가택 연금하고 결혼을 금지했다. 태자 이홍의 중재로 671년경 결혼이 허락되었으나, 무후는 친위대와 즉시 결혼시켰다. 소숙비의 아들 이수절은 황태자가 되지 못하고 무후에게 미움을 받아 감시당하다가 690년 무후의 명령으로 살해되었다.[6]
5. 사후
당나라 역사서인 『구당서』는 소숙비 사후 약 400년 뒤에, 『신당서』는 945년경에 쓰여져 『구당서』보다 부정확한 정보가 적다.[4] 두 책 모두 소숙비와 측천무후 활동 시기로부터 수백 년 뒤에 편찬되어 충격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으나, 『구당서』는 소숙비와 왕황후의 질식사를 명확히 밝혀 고대 의료 환경에서 인간이 견딜 수 있었던 다양한 고문과 구별된다.[4]
8세기에 쓰여진 『당회요』에는 이 사건이 기록되지 않았다. 송나라 이후 역사가들은 측천무후를 헐뜯고 이후 황후들의 권력을 억제하기 위해 한나라 여태후 여치의 행적을 각색한 것이라 결론 내렸다. 측천무후와 유사한 삶을 살았던 유황후는 『신당서』 편집자들과 함께 하기도 했다.
『신당서』와 『구당서』에는 여러 불일치가 있으며, 최근 발굴된 묘지명과 역사서를 비교하며 더 많은 불일치가 나타났다. 상관완아 묘지명의 내용 일부는 관련 기록과 상반된다. 따라서 이 텍스트를 읽을 때는 주의가 필요하며, 소숙비와 왕황후는 질식사했을 가능성이 높다.
5. 1. 가족의 운명
왕황후가 폐위된 지 6일 후, 무씨는 황후로 책봉되었다.[5] 새 황후 무씨의 명령에 따라 왕황후와 소숙비는 궁궐 내에 감금되었다. 문과 창문이 꽉 막힌 건물 안에 갇혀 음식만 전달할 수 있는 벽에 구멍이 뚫려 있었다. 어느 날, 고종은 그들을 생각하고 방문하여 그들이 처한 상황을 보고 슬퍼하며 "황후, 숙비, 어디 있소?"라고 외쳤다. 왕황후는 울면서 "저희는 죄를 짓고 시녀로 전락했습니다. 어찌 존칭으로 불릴 수 있겠습니까?"라고 답했다. 또한 "만약 폐하께서 저희의 지난 관계를 고려하시고 다시 햇빛을 보게 해주신다면, 이 곳의 이름을 '회심원'(回心院, "참회의 정원"이라는 뜻)으로 바꿔 주십시오."라고 간청했다. 고종은 처음에는 호의적으로 "그렇게 하겠다."라고 답했다. 그러나 무황후는 이 말을 듣고 격노하여 그들의 사형을 명령하고, 사람들을 보내 왕황후와 소숙비에게 각각 100대의 매질을 가하고 손과 발을 잘라내게 했다. 그리고 그들을 큰 술 항아리에 넣고 "이 두 마녀가 뼈까지 술에 절게 하라!"고 말했다.[6] 왕황후는 이 명령을 듣고 절하며 "폐하 만수무강하시고, 조의(昭儀, 무후가 후궁으로서의 칭호이며, 황후로 인정하지 않음을 암시함)가 영원히 총애받기를 바랍니다. 죽는 것은 제 책임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소숙비는 무후를 저주하며 "무씨는 간사한 괴물이다! 내가 고양이로 환생하고, 그녀는 쥐로 환생하여 영원히 그녀의 목을 물어뜯겠다!"라고 말했다. 왕황후와 소숙비는 술 항아리 안에서 며칠 동안 고통을 겪다가 죽었고, 무후는 그들의 시신을 술 항아리에서 꺼내 목을 베었다.무후는 소숙비의 저주를 듣고 궁궐 사람들이 고양이를 애완동물로 기르는 것을 금지했으며, 심지어 수도 장안에서 고양이를 애완동물로 기르는 것을 금지하도록 명령했다. 그러나 그 후 왕황후와 소숙비가 흩어진 머리카락과 피투성이의 사지로 그녀를 죽이려 하는 꿈을 자주 꾸었다. 그녀는 처음에는 봉래궁으로 거처를 옮겼지만, 계속해서 그들의 꿈을 꾸었기에 결국 수도 장안이 아닌 동쪽 수도 낙양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왕황후와 소숙비가 죽은 직후, 무후의 강요로 고종은 왕황후와 그녀의 일족 성씨를 왕(王)에서 망(蟒, "비단뱀"을 의미)으로, 소숙비와 그녀의 일족 성씨를 소(蕭)에서 효(梟, "올빼미"를 의미)로 바꾸었다. 705년 무후가 사망한 후에야 그들의 제대로 된 성씨가 복원되었다.
무후의 명령에 따라, 소숙비의 두 딸, 의양공주(義陽公主)와 고안공주(高安公主)는 궁궐에 가택 연금되었고 결혼이 허락되지 않았다. 이홍이 중재한 후에야, 아마도 671년에 그들은 결혼이 허락되었다. 그러나 무후는 단지 두 명의 친위대, 전의(權毅) (의양공주)와 왕욱(王勗) (고안공주)를 찾아 즉시 그들과 결혼시켰다. 한편, 이수절은 황태자가 되는 것이 허락되었지만 끊임없이 무후의 미움을 샀고, 여러 차례 강등되어 감시를 받았다. 무후의 명령에 의해, 그녀의 천수(天授) 연간에 살해되었다.
6. 현대적 묘사
숙비 소씨는 여러 미디어 매체에서 극중 인물로 묘사되었다.
6. 1. 관련 작품
- 1984년 홍콩 TV 시리즈 《측천무후》에서 찬 초이 인이 연기했다.
- 1985년 대만 TV 시리즈 《황조의 여제》에서 쿵 리엔 후아가 연기했다.
- 1995년 중국 TV 시리즈 《무측천》에서 위혜가 연기했다.
- 2003년 중국 TV 시리즈 《무씨 부인: 최초의 여제》에서 제시 창이 연기했다.
- 2006년 중국 TV 시리즈 《무자비가》에서 셰 진 티엔이 연기했다.
- 2006년~2007년 SBS TV 드라마 《연개소문》에서 반민정이 연기했다.
- 2011년 TV 시리즈 《무측천비사》에서 리 나가 연기했다.
- 2011년 중국 TV 시리즈 《몽회당조》에서 수이 쥔 보가 연기했다.
- 2011년 중국 TV 시리즈 《당궁미인천하》에서 조희문이 연기했다.
- 2014년 중국 TV 시리즈 《무미랑전기》에서 장신위가 연기했다.
- 2014년 중국 TV 시리즈 《소년신탐적》에서 리 원 원이 연기했으며, 극 중 배역명은 "서빈(Consort Xu)"으로 변경되었다.
- 2017년 중국 TV 시리즈 《전기적인 적인걸》에서 류 하이 란이 연기했다.
참조
[1]
서적
Old Book of Tang
[2]
웹사이트
舊唐書 列傳 卷三一至四十
http://ef.cdpa.nsysu[...]
2007-10-11
[3]
서적
Bo Yang Edition of Zizhi Tongjian
[4]
웹사이트
唐書 列傳 第一至十
http://ef.cdpa.nsysu[...]
2008-02-19
[5]
서적
Zizhi Tongjian
[6]
웹사이트
唐書 列傳 第一至十
http://ef.cdpa.nsysu[...]
2008-02-19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